니체의 숭고한 이상
인생을 살아가며 쉴새없이 마주치는 의문들이 있다. 답을 써 내기까지 들이는 고민의 경중이나 대답의 장르가 다를지언정 누구나 답변하게 되는 본질적인 의문들, 가령 삶의 이유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들이다. 개중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왜 사는가’ 라는 물음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진다. 한 개인이 가진 방향성은 종종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는 방법이 되며, 무수한 선택들의 이유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색채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삶을 관통하는 뚜렷한 기준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폭풍같은 상황이 닥쳐와도 자기만의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인생의 기준은 필요하다. 망망대해의 푯대 같은 역할을 할 기준 말이다.
그러나 멀찌감치 깃발을 꽂은 뒤, 그를 향해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과연 이 푯대는 올바른 푯대인가? 이상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지시 사항이 맞는가? 푯대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제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다양한 잣대와 견해들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로 귀결되는 자신만의 결론, 자신만의 화살표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더는 짧다고 할 수 없을 발자취를 지닌 인류의 역사로 인해 세상에는 이미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객관적이고 범지구적인 다양한 제안사항들이 존재한다. 이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란 무엇이며,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땅을 딛고 설 텐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하나의 가설을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얻었다. 니체는 이상적 삶에 대해 ‘초인’ 을 들어 답한다.
스스로를 뛰어넘는 자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한다.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을 뛰어넘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자기 이상의 것을 창조했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거대한 조류의 한가운데서 그저 썰물이기를, 인간을 초월하느니 차라리 동물로서 퇴화하기를 원하는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초인(독일어 ‘Übermensch, 위버멘쉬’ 의 역)이란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중요시하는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극한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니체는 인간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궁극적 종착역이 바로 초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초월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비극적 어려움이 수반되더라도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고 목표에 도달하며 창조적 결과물을 낳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동물과 초인 그 사이의 존재이며, 동물적인 본능에 끌려가지 않고 위버멘쉬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는 숭고하다.
초월을 위한 몰락
“(중략)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의 과도(過度)이자 하나의 몰락이라는 데 있다. 나는 몰락 이외에는 살아갈 방법을 모르는 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피안을 향해 건너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피안: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
니체는 통용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몰락’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몰락하는 삶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니체에게 몰락이란 현재의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새롭고 정제된 자아를 가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많은 사람들은 몰락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자아를 수립하고 성장하는 데에는 자연스럽게 고통이 뒤따르지만, 안정을 추구할 경우에는 이러한 몰락의 과정이 꺼려질 수밖에 없다. 니체는 이 같은 정서를 비판하며 질 낮은 안정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려는 도전적인 정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새것을 정의하고 기존의 자신을 거듭해서 부정하며 더 높은 가치를 일궈내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삶의 가치이자 나아갈 방향이다. 출생에서부터 기존에 갖춰진, 문명에 의해 세워진 기본 틀에 의거해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온 행위, 옛 사고, 혹은 본능이 이끄는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옳고 그름의 가치를 창조하고 스스로 정립한 ‘옳음’ 의 위치에 한없이 수렴해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이상적이고 고상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이상에 대해 생각할 때면 하늘로 끝없이 자라나는 나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다만 험악한 날씨나 새들의 공격 따위의 장애물을 겪으면서도 이 나무의 가지는 얇아지지 않고 꾸준히 튼튼해지며, 그 끝마다 창조성의 산물인 품질 높은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낸다.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창조적 직구
위험하게 살아라. 당신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세워라. 당신의 배를 미지의 바다를 향해 띄워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라.
(니체, <즐거운 학문> 중)
위태로운 비탈길에 도시를 건설하는 일, 밝혀지지 않은 바다를 향해 배를 띄우는 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는 일은 모두 기존의 안정 상태를 떠나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틀을 초월하는 일이다. 기성의 것들에 안주하고 순응하며 살 때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요구되며, 고된 여정일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위험천만한 여정의 끝에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진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 끝에서 비로소 더 발전된, 더 완전함에 가까운 모습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의 글을 읽으면 순전히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짜릿하고 힘든 여정에 발을 내딛고 싶어진다. 많은 것이 알려진 세계에 존재하는 여전히 수많은 새로운 것들을 탐색할 용기와 의지가 생긴다. 안전과 몸의 안락함,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오는 평안,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물론 니체의 글은 여타 철학자들의 글과 같이 농축된 상태의 이상을 온전히 담은 것이기 때문에 완벽히 답습해 삶에 옮기기에는 다소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다만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한 인생상의 길을 눈으로 짚어 따라가 보고, 이를 자기 삶에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겠다. 약 140년 전 니체가 그렸던 극복과 초월이라는 이름의 화살표가 당신의 삶의 부표를 띄울 자리를 겨냥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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