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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 불안의 서 > , 페르난두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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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우리의 느낌만을 유일한 실제로 지각하고 그 안에서 도피처를 구한다. 우리의 느낌을 거대한 미지의 왕국으로 보고 그것을 탐구한다. 우리가 쓰는 산문과 시는 낯선 이의 이해를 구하거나 그들의 의지를 설득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한 명의 독서가에 의해 소리 내어 말해지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조의 미학뿐 아니라 관조의 방법과 결과의 표현에도 마찬가지로 미학적인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이미 주관적 책읽기를 즐기기 위한 객관적 토대가 완성된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미학적 관조 중에서도 우리가 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불확실한 관조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상의 만물은 모두 불완전하다. 지금,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저 석양은 아직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를 지금보다 더 부드러운 잠에 빠지게 만드는 산들바람은 아직 한 번도 불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변함없는 시선으로 산과 석상들을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책과 함께 즐길 것이다. 만물을 우리의 본질로 내면화하겠다는 그 생각으로 모든 것을 몽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탄생하자마자 낯설어질 묘사와 분석을, 마치 하루의 마지막에 모든 풍경이 낯설게 변하듯이 그렇게 변해버릴 묘사와 분석을 애써 준비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즐길 것이다.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무의미할 것

이 분명한 나의 목소리는 수천의 목소리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굶주림을 고백하는 수천의 목소리를, 내 영혼과 마찬가지로 일상이라는 운명에 굴종한 채 헛된 꿈과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희망을 차마 파기하지 못하고 있는 수백만 영혼의 끝없는 기다림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의문이 드는 순간 나는 내 심장을 의식하므로,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뛴다. 나는 더 높이 살아가므로, 나는 더 많이 산다.

 

 

나는 마치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낯선 집, 도라도레스 거리의 널찍한 사무실로 돌아간다. 나는 삶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방호벽에 기대듯이, 책상에 기대어 앉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이 애틋하다. 내가 숫자를 기입하는 회계장부, 내가 사용하는 낡은 잉크병,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물품송장을 작성하느라 구부정한 등을 하고 앉아있는 세르지우까지. 이 모든 모습을 나는 사랑한다. 아마도 이것 말고는 사랑할 만할 대상이 없어서일 것이다. 혹은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랑도 영혼에 비길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감상에 빠져 사랑을 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밤하늘 별들의 위대한 무심함을 사랑하듯이 내 조그만 잉크병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를 본다. 나는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절도 있는 그의 몸짓을 본다. 외부의 사물들을 속에 담고 생각하는 그의 눈동자를 본다. 어쩌다가 그가 나 때문에 불쾌해하는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러다가도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 내 영혼까지도 덩달아 기쁨이 넘친다. 입을 크게 벌린 그의 인간적인 미소는 수많은 군중이 보내주는 동의의 박수갈채와도 같다.

아마도 내 주변에 바스케스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며 심지어는 세속적인 인간인 그가 내 마음을 이토록 자주 지배하고 나의 관심사를 나 아닌 다른 대상으로 돌려놓는 것이리라. 나는 상징이 존재함을 믿는다. 나는 어딘가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삶에서, 이 남자가 나에게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소중한 역할을 했을 거라고 믿고 있거나, 혹은 거의 믿는 편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아득한 심연입니다.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입니다.

 

 

 

 

 

 

 

나는 전기로 기록될 만한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혹은 직접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록 이 감정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지만, 막연한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상호 어떤 연관성도 없고 연관성을 구축하고 싶다는 소망조차 배제된 인상을 이용하여, 나는 사실 없는 내 자서전, 삶 없는 내 인생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내 고백이다. 내가 고백 속에서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건 털어놓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감각을 재료로 하여 풍경을 만들어낸다. 내 느낌의 휴가를 떠난다. 나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 수를 놓거나, 단지 살아 있기 때문에 양말을 뜨는 여자들을 이해한다. 나이 든 내 숙모님도 긴긴 저녁이면 혼자서 카드점을 보곤 했다. 나에게는 느낌의 고백이 카드점인 셈이다.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생각은 자유다. 상아 코바늘이 하나하나 코를 완성하는 동안, 마법에 걸린 왕자가 정원을 산책한다. 코바늘로 만들어지는 사물들... 그 사이의 공간들... 텅 빈 채 아무것도 없는...

 

 

모든 표현의 바닥에서 나는 별것 아닌 채로 잔존한다. 나는 회계장부를 작성할 때와 마찬가지의 기분으로, 신중하지만 담담하게 글을 쓴다. 끝없는 밤하늘의 별들과 무한한 영혼의 비밀, 미지의 심연을 가진 밤, 아무것도 알 수 없음이라는 깊은 혼돈, 이 모든 것과 비교하면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조그만 업무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영혼의 기록은 둘 다 도라도레스 거리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사건의 일부일 뿐이다. 그 위에는 수백만 배나 더 의미심장하며 수백만 배는 더 위대한 우주공간이 말없이 펼쳐져 있다.

이것은 모두 꿈이며 신기루다. 장부를 기입하는 꿈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산문을 쓰는 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주가 등장하는 꿈이 왜 사무실 문이 나오는 꿈보다 대단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이며, 그중에서도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감각이다. 우리의 삶은 느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연기자이자 청중,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의 역할까지도 담당하는, 시의회의 승인을 받은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한 발 한 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내면의 풍경을 정복해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속수무책으로 빠져 있던 수렁에서 기어나왔다. 나는 무한한 내 존재를 낳았다. 집게를 들고 나 자신을 나로부터 뽑아내버렸다.

 

 

언제나 내 삶은 현실의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 있다. 나를 얽매는 제약을 좀 해결해보려고 하면, 어느새 같은 종류의 새로운 제약이 나를 꽁꽁 결박해버리는 상태다. 마치 나에게 적의를 가진 어떤 유령이 모든 사물을 다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 목을 조르는 누군가의 손아귀를 목덜미에서 힘겹게 떼어낸다. 그런데 방금 다른 이의 손을 내 목에서 떼어낸 내 손이, 그 해방의 몸짓과 동시에, 내 목에 밧줄을 걸어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벗겨낸다. 그리고 내 손으로 내 목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나를 교살한다.

 

 

인간의 눈 속에는, 설사 석판화의 그림이라고 해도, 뭔가 경악스러운 것이 들어 있다. 어떤 의식의 불가피한 증명, 영혼을 증언하는 비밀스러운 외침. 나는 축축한 잠의 상태로부터 힘겹게 빠져나온다. 한 마리 개처럼 어두운 안개의 입자들을 온몸에서 털어내버린다. 형이상학적 석판화 속 깊고도 깊은 슬픔에 잠긴 눈동자는 멀어져가는 나를 계속해서 가만히 응시한다. 마치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이고 내가 떠날 일은 영영 없으리란 듯이, 그 눈동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내 모습을 좇는다.

 

 

모든 감정에 개성을 부여한다. 모든 정신의 상태에 영혼을 부여한다.

 

 

들판은 그것이 언어로 묘사될 때 실제보다 더욱 녹색을 띤다. 꽃을 문장으로 표현할 때 그 문장은 상상의 영역에서 꽃을 정의하는 것이며, 이때 꽃의 색채는 원래 식물세포가 결코 이룰 수 없는 항구성이란 특징으로 치장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말 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월등하게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꿈 혹은 음악의 한 줄기 여운. 거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 생각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

 

 

마지막 빗방울이 여전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지붕에서 떨어져내린 후 포장된 도로 한가운데서 새파란 하늘빛이 완연하게 반사되는 순간, 거리를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이 갑자기 다르게 들린다. 더 높고 더 유쾌한 울림으로 대기가 가득 찬다. 활짝 열어젖혀지는 창들은 태양을 잊지 않았다는 신호다.